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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um Posts

NewDaysChurch
Jul 12, 2025
In 목회칼럼
성경에서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중에는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랑객처럼 떠돌던 야곱이 있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까지도 속이면서 장자의 자리와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았습니다. 장자와 장자권의 축복을 다 얻은 것 같았지만, 분노하는 형 에서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집을 떠나 방랑객처럼 정처 없이 외갓집으로 향하였습니다. 방랑은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는 인생입니다. 야곱은 방랑객처럼 정처 없이 외갓집으로 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때로는 방랑객처럼 정함 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은 우리들을 기억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불러드릴 때, 이번에는 방황하게 됩니다. 방황은 새로운 방향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방향은 오직 예수께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께로 향한 방향에서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방황할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다시 예배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제는 내 삶에 어떤 태풍이 불어도, 오직 예수께로 향한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방랑과 방황과 방향(25년 7월 13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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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Jul 05, 2025
In 목회칼럼
누구나 평범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남들보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지 못한 물건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명품을 소유하려는 심리도 비슷합니다. 앞집도, 뒷집도, 옆집도 다 소유하고 있는 물건보다는 아무나 쉽게 소유하기 어려운 물건을 원합니다. 이렇게 특별한 물건을 소유만 해도 자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하루살이와도 같습니다. 하루살이와 하루 종일 놀다가 헤어지면서 “내일 다시 만나자”고 인사하면, 하루살이는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내일이 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사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하루를 산다고 하였습니다. 하루 속에는 아침과 저녁이 있을 뿐, 어제와 내일은 없다고, 하루살이처럼 하루를 잘 산 것이 일생을 잘 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를 잘 산 것이 특별한 삶이요,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누구와 동행했을까? 예수님과 동행했다면 특별한 하루요, 특별한 인생이 됩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인가(25년 7월 6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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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Jun 28, 2025
In 목회칼럼
세상 모든 만물은 나름대로 냄새를 풍기며 살아갑니다. 향기로운 냄새로 상대방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악한 냄새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식물의 경우에는 향기로운 냄새로 벌들을 유혹하여 꽃가루가 수정되게 하는가 하면, 고약한 냄새를 풍겨 동물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받기도 합니다. 동물들도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으려고 고약한 냄새를 풍겨 위기를 넘깁니다. 사람도 겉으로 풍기는 각자의 고유한 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풍기는 냄새만으로는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냄새와 행동에서 나오는 냄새로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입에서 풍기는 냄새는 바로 언어입니다.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선한 냄새가 되기도 하고, 악한 냄새가 되기도 합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행동은 선한 향기를 내지만, 어떤 행동은 악한 냄새를 풍깁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이 드리는 제사의 제물을 직접 받으시는데, 어떻게 제물을 받으실까?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 입술로, 내 행실로 풍기고 있습니다. 내 삶을 통해서 복음의 향기만을 풍기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슨 냄새를 풍기는가? (25년 6월 29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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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Jun 21, 2025
In 목회칼럼
신앙의 본질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어떻게 드릴 것인가? 형식적인 예배도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사람들과의 체면 때문에 때로는 직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드립니다. 형식의 예배자는 예배도중에 온갖 잡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불안석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보시고 기뻐하실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을 덮고 있던 가면을 벗고 진실 되게 드리는 예배자를 원하십니다. 이런 예배자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62:5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렇게 진실된 예배자가 아니고 형식의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짜증은 내지 아니할까? 우리들이 드린 예배는 다시는 뒤돌아오지 아니합니다. 내 생애 마지막 예배라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얼마나 진실되게 소중하게 드리지 않겠어요. 이런 예배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의 모습은 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나무뿌리는 깊은 땅속에서 자라나듯이 우리들의 예배가 나 예배드린다고 외치지 아니해도 하나님은 보고 계시면서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도 나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뻐하신다(25년 6월22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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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14, 2025
In 목회칼럼
미국 남침례 교단의 리처드 랜드 목사가 어느 세미나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미국에 새로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무명의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하나님은 미국에 놀라울 만큼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미국은 놀라운 축복에 감사가 식어지면서, 복을 누리기에도 지쳤는지 잠들었습니다. 랜드 목사님의 외침이 허공에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잠든 크리스천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깨어나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교회에서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가정이 다시 예배로 잠에서 깨워야 합니다. 가정이 예배로 깨어날 때 교회가 깨어나고 세상이 깨어서 일어납니다. 오늘은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날입니다. 어머니날에 비해서 아버지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정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버지의 위상은 점점 추락하고 반대로 어머니들의 힘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아버지들이여! 영적으로 깨어서 가정에서 예배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육신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영적 힘을 가지고 가정예배의 인도자가 될 때 영적권위를 높여줍니다. 주님이 위에서 내려주시는 영적권위로 아버지들이 사랑으로 높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 드리는 가정(25년 6월 15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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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07, 2025
In 목회칼럼
인간이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무한의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유한한 삶을 살다보니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유한한 세계에서는 하루를 살아도 허무하며, 백년을 살아도 허무한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엇에 바쳐진 삶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바쳐진 삶일까요?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아갈 때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께 나를 바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를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바쳐진 인생을 살 수 있겠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음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쳐진 인생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바쳐진 인생(25년 6월8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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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31, 2025
In 목회칼럼
세상에서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비속어가 있습니다. ‘기회주의자’라고 부르며, 이런 사람은 약아서 남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본인도 절대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회를 잘 활용하다 보니 사람들과의 관계는 깊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다가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완벽한 여인을 기다리는 사이 사랑은 모두 지나갔고,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이미 중년이 넘어섰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창업 할 기회만을 찾다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야심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완벽한 기회도, 완전한 순간도 없습니다. 기회가 찾아왔는데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감이 없어서, ‘이건 내 기회가 아니야’라며 찾아온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기회는 모험이 따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모험을 감수하며 도전하였고, 그 때 주님은 함께하시며 도와주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도 기회는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기회는 대박이 터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회일까요? 골로새서 4장2절 말씀을 되새겨 보면,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믿음으로 모험하며 도전할 때, 주님은 함께 하시며 세상이 놀라워하는 승리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기회는 항상 준비되어있다(25년 6월 1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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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4, 2025
In 목회칼럼
새날교회는 2001년도에 창립되어 올해로 24살의 청년이 되었습니다. 창립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아파트 거실에서 예배드리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섯 명의 가족들이 아파트에서 가정예배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 궁급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이나 24년 전을 회상해보면 “그때에도 주님이 하셨으니 생각지도 못한 분들이 찾아올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파트에서 예배 드리려니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찬송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없었고, 친교 시간에도 비좁아서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자매 한 분이 자신은 새날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해서 주택을 구입하여 새날교회가 예배 드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주택 구입을 결심하게 만든 자매님은 실제로 그 주택의 뒷뜰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주택에서 3년간 예배드리면서 주님은 릴번 지역의 빌딩을 2003년도에 구입하게 하셨고 2004년에 입주예배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또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둘루스 지역의 건물을 2010년도에 구입하게 하셨고, 리모델링을 마친 후 2011년 1월에 입주예배를 드리며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4년을 뒤돌아보면 모든 일에 주님께서 친히 간섭하셨고 성도님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습니다. 이제는 1세대의 시대가 점점 쇠퇴되어 가면서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가 필요할 때입니다. 이민자들의 세대를 보면 벌써 2세대, 3세대, 4세대까지 이르렀습니다. 1세대 이민자들은 줄어들고 고령화되어 가지만 다음세대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다음세대를 위해 교회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세대를 생각해 보았는가?(25년 5월 25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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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7, 2025
In 목회칼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별스러운 말도 아닌데 토라지고, 바득바득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시키려 해도 상대방의 주장을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이해시키려 하면 할수록 더 파르르 떨며 혈기를 부립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밴댕이 소갈딱지’라 부르며, 가까이 하기에는 먼 당신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밴댕이’는 어떤 어종이기에 좋지 않은 비유에 등장시키는가? 밴댕이는 청어과에 속한 아주 작은 물고기입니다. 다른 물고기와 다르게 속이 좁아서, 마치 내장이 없는 듯 하다고 합니다. ‘속이 좁다’는 것은 ‘마음이 좁다’는 의미로 작은 일에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폭발한다는 뜻입니다. 밴댕이도 이와 같이 성질이 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낚시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리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비틀다가 결국 죽는다고 합니다. 성질 급한 밴댕이는 화를 참지 못하면 속이 녹아서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밴댕이 콧구멍’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소견이 좁고 용렬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좁아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의 폭이 좁아져서 마음에 성벽을 쌓게 됩니다. 결국 마음의 성벽 안에 고립되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도 내 마음의 성벽을 허물고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환영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지라(25년 5월 18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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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May 10, 2025
In 목회칼럼
오늘날 세상에는 ‘거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거저’란 대가나 조건 없이, 즉 공짜로 주거나 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공짜처럼 보이는 일에도 항상 조심하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공짜 점심은 없다”함에 불구하고 공짜를 내세운 상술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현혹되어 대가를 치르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 만큼은 아무 대가 없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서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혹독하게 대가를 치루셨고, 온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루셨을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의 모성애도 대가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어리광부리고 싶은 대상은 누구보다 어머니일 때가 많습니다. 자식들의 온갖 짐을 다 짊어지시기에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속 깊은 마음도 모르고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걱정도 팔자”라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한없이 사랑만 베풀다가도, 자식들이 말썽을 부리면 어머니의 입은 거칠어집니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역정을 내시지만, 돌아서서는 가슴앓이 하는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세요. 항상 거저 주시는 사랑에 “어머니 사랑해요” 라고 고백을 해보세요. 어머니의 근심과 걱정이 싹 사라지고 환하게 웃고 계실 겁니다.
거저주시는 어머니의 사랑 (25년 5월 11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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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03, 2025
In 목회칼럼
인생은 만남으로 연결되어 살다가 만남을 뒤로 하고 이 땅과 이별을 합니다. 이 땅과의 이별로 끝이 아니고 영원한 공간에서 주님과 다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출생하면 첫 만남은 부모이고 다음은 형제들입니다. 부모와 형제들과 친구들과 만남의 즐거움을 알만할 때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갑니다. 닮아만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쁜 소리도 듣게 됩니다. 이 소리를 복된 소리라고 합니다. 복된 소리를 듣게 되면서 내 입술에서도 복된 소리, 기쁨의 소리가 나갑니다. 복된 소리로 말할 때 주님이 나를 보시고는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존재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외면하고 사람만 만나면 나도 모르게 사람을 닮아갑니다. 사람을 닮아가면서 사람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서 내 입술에서도 사람의 소리만 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보배로운 소리가 복되고 기쁜 소리입니다. 복되고 기쁨의 소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보배로운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배로운 존재(25년 5월 4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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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26, 2025
In 목회칼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데카르트는 말했습니다. 나의 실존을 나타내는 생각이 언어가 되어 내 입술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내가 말하는 언어는 내 생각이요, 내 인격이요, 내 힘이기도 합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능력 있는 말이 되기도 하고,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존재감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가? 데카르트는 생각하면 나는 존재한다고 했지만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가 나를 존재감 있게 나타냅니다. 어떤 존재감을 나타내는가는 말을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아무리 박학다식한 말을 할지라도 그 속에 영이 없고 생명이 없으면 지식으로는 박학하지만 생명력이 없으니 죽은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말이 어눌하고 더듬거리면서 말을 할지라도 생명력 있는 말 한마디가 시든 영혼을 살려냅니다. 인간의 언어의 힘은 무궁무진합니다.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도 하고 나의 존재감이 추락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들 생각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세요. 내 입술로 나가는 언어는 예수의 마음이 나갑니다. 예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언어의 힘 (25년 4월 27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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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Apr 19, 2025
In 목회칼럼
인문학 교수이셨던 고 김흥호 목사님은 부활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부활은 터져 나옴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터져 나온다고 하였을까? 기쁨이 터져 나오고,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씀이 터져 나오고, 싹이 터져 나오고, 꽃이 터져 나오듯 생기가 차고 넘쳐 터져 나옴이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인간이 숨이 멈춤으로 의사는 사망했다고 판정되어 장례식을 준비하는데 죽은 인간이 깊은 숨을 토해내며 한숨이 터져 나옴으로 죽은 사람이 산사람으로 바뀝니다. 이때 가족들은 얼마나 기쁘고 기쁠까? 예수님도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바위 문이 열리고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꽃 봉우리가 터지듯 예수님은 죽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가슴에 꽉 막힌 듯한 문제들이 한순간 가슴이 터지듯이 뻥 뚫릴 때 살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입니다. 바울은 예수쟁이들을 전멸시키려고 식식거리면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막혔던 가슴이 터질 듯한 생명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터질 듯한 기쁨과 감격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야로 뛰어다녔습니다. 이때 수많은 박해가 길을 막았지만 터져 나오는 복음의 열절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부활의 믿음으로 터져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25년 4월 20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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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Apr 12, 2025
In 목회칼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밀알이 땅에서 죽어질 때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을 만났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물을 만났거나 콘크리트 바닥을 만났더라면 결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떨어져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곧 무한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한을 만날 때, 우리는 무한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땅은 유한할 뿐입니다. 인생은 땅으로 태어나 유한한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하늘로 떨어져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땅의 사람을만나면 그저 유한한 존재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날 때, 영원한 존재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존재로서 유한한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유한된 인생을 무한된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종려주일에 무한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많은 백성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 이 찬송은 유한된 인간들의 유한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무한된 존재로서 호산나, 구원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종려주일(25년 4월 13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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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Apr 05, 2025
In 목회칼럼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비범한 곳에서 이상한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깊은 산속으로, 끝이 없이 펼쳐진 광야로도, 외딴 섬으로도 떠납니다. 이런 사람들을 아직도 눈 먼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옛말에 도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곳에도 진리가 있습니다. 가장 평범한 곳에서 가장 비범한 하나님의 이웃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만이 인간으로서 가장 비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우주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이 말에 시각장애인들은 내게 아름다운 경치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앞이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질문할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눈 뜬 사람에게만 보여주는데도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고 계시는데도 어디계시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가장 평범한 곳에 계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가장 평범한 곳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계실까?(25년 4월6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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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Mar 29, 2025
In 목회칼럼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주님께 무언가를 구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평생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유대인들은 보이는 표적을 원했습니다. 반면, 헬라인들은 보이지 않는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믿음으로 무엇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도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가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지혜를 구하는가요? 혹시 우리도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고후4:1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고 하였음에도 현실에서는 눈에 보여야 능력으로 여기고, 눈에 보여야 실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고난당하심을 조금이라도 내 피부로 느끼며, 감사함으로 영원을 향하고, 구원을 향하는 사순절이 되시기 소망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25년 3월 30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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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Mar 22, 2025
In 목회칼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서적 거리가 있으며,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주 가까운 사이, 밀착된 것처럼 항상 붙어 다닐때는 서로가 보기만 해도좋아서 싱글벙글하는 사이도있습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사이도 좋지만, 주님과의 사이도 아주 가까워서 주님만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사이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과의 사이는 떼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인데, 주님과 나와의 사이는 멀고 먼 거리로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요? 마치 ‘소 닭 보듯’ 본숭만숭한 관계는 아닌지요?        이번 사순절을 보내면서, 어떻게 하면 주님과의 사이를 좁힐 수 있을까?        새날교회에서는 16년째 성경 66권을 필사하고 있습니다.한 자씩, 한 자씩 손글씨로 성경을 써 내려갈 때, 놀랍게도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더욱 깊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분께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고난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며, 나를 위해 고난당하심을 알 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그동안 멀어졌던 주님과의 사이를 좀 더 가까운 사이로 변화시키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나와는 가까운 사이인가? (25년 3월 23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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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Mar 15, 2025
In 목회칼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지배하고, 정복하고, 충만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 시대에는 지배하지도 못했고, 정복하지도 못했으며, 충만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세 가지를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직 자식도 없을 때, 또 약속하셨습니다. “네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번성하리라.” 여기까지는 은혜스러운 말씀으로 받았는데, 이번에는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자식도 없는 아브람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라. 그러나 너희를 괴롭힌 나라를 내가 징벌함으로 네 자손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람의 증손자 요셉을 선택하셨습니다. 요셉은 지배하고, 정복하고, 충만한 축복을 이루기 위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충만한 축복의 기반을 닦기까지 요셉은 아름다운 채색옷이 벗겨지고, 종의 옷을 입었으며, 죄수의 옷을 입고 감옥 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환경을 불평하지 않았고,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았으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순응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요셉에게 애굽 총리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요셉에게 주어진 이 축복이 우리들 모두의 축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총리의 옷을 입혀주시는 주님(25년 3월 16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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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8, 2025
In 목회칼럼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점을 살펴본다면, 먼저 아마추어의 옷을 입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프로의 옷을 입은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도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35절에는 강도를 만난 사람과 그를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과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 거의 죽게 된 채 길가에 버려졌고, 강도들은 도망갔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제사장의 옷을 입은 사람도, 레위인의 옷을 입은 사람도 지나갔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한 채 피하여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가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회복할 수 있도록 여관까지 인도해 주고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전문가의 옷을 입은 프로들은 왜 그냥 지나갔을까? 직업상 의무만 있었을 뿐, 자신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 같아서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비전문가의 옷을 입은 아마추어는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도 전문가의 옷을 입었든, 아마추어의 옷을 입었든, 내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의 옷을 입고 돌봐주고 보살펴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나는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 (25년 3월 9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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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aysChurch
Mar 01, 2025
In 목회칼럼
요셉은 평생 다섯 번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자신이 원해서 입은 옷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첫 번째로 입었던 채색 옷도 요셉이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야곱이 일방적으로 입혀준 것이었습니다. 13명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채색 옷을 딸 디나도 아니고, 열한 번째 아들 요셉만이 입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입고 싶어 하고 부러워하는 채색옷도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종의 옷으로 갈아입혀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복이 화로 바뀌면서 분노가 일어날 만한 종의 옷을 입었음에도 요셉은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일반 평범한 가정에 노예로 팔린 것이 아니라, 당시 애굽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바로왕을 지키는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린 것입니다. 종을 거느리는 주인은 새로 들어온 노예 한 명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함을 보았고, 주인이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님이 그 노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팔려온 요셉이 주인에게 은혜를 입히자, 보디발은 그를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가정 총무로 승진시켰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셨습니다. 노예의 옷을 입었다고 세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이라도 내게 주어진 옷을 입고 먼저 주님께, 그리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바닥에서 준비하고 계시는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으로 만족하는가?(25년 3월 2일) content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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